Raymundo Albano, Step on the Sand and Make Footprints,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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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ymundo Albano, Step on the Sand and Make Footprints, 1975, Installation view © the Cultural Center of the Philippines archives

Raymundo Albano, Step on the Sand and Make Footprints, 1975

인류의 역사에는 수많은 의미심장한 발자국들이 있었다.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처음 광야에 들어섰을 때, 그들을 따르는 것은 오직 발자국 밖에는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또한 달에 새겨진 버즈 올드린Buzz Aldrin의 발자국을 기억하고 있다. 닐 암스트롱Neil Arrmstrong의 ‘이것은 인간에게 작은 한걸음에 불과하지만, 인류에게는 거대한 도약이다 That’s one small step for (a) man, one giant leap for mankind.’라는 말과 더불어 기억되는 그의 발자국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인간의 도전과 무한한 가능성을 함축한다. 그리고 우리는 수많은 개인들의 발자국들을 알고 있다. 그것이 역사적 성취로 기념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이름없는 자들의 발자국을 통해서 우리는 현재가 있으며 미래를 꿈 꿀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필리핀 작가 레이문도 알바노 Raymundo Albano의 1975년 작업, ‘모래에 발을 내딛고, 발자국을 만드세요 Step on the Sand and Make Footprints’는 나에게 발자국의 의미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이 작업은 매우 간단하다. 지금은 1975년 시행된 자료 사진을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지만, 사진으로도 이 작업이 갖는 의미를 상상하기에는 충분하다. 사진에 따르면, 어두운 갤러리의 방 전체에 모래를 깔고, 한쪽에서 낮게 조명을 드리운 것이 전부이다. 어두운 조명이 비추는 모래 위로 사람들은 자유롭게 자신의 발자국을 남긴다. (이 작업은 2008년 광주비엔날레 ‘발원지에서 방향전환: 작가-큐레이터’ 전에 재현되었는데, 아쉽게도 전시장 가운데 사각형의 틀을 만들고 그곳에 모래를 깔아 놓아 평범한 모래 놀이터처럼 만들어 놓아 버렸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독립한 동남 아시아 국가들의 근대적 국가 만들기의 과정 속에서 현대미술의 성립과정을 개념적 태도와 관련 지어 연구하는 미술사학자이자 큐레이터인 패트릭 플로레스Patrick D. Flores는 이 작업에 대해서 매우 간단하게 설명한다. 복제replication의 불가능성에 대한 탐구의 확장으로 사람들이 자유롭게 모래사장 위에 발자국을 남기고, 그렇게 만들어진 발자국의 조형성을 통해서 우연성으로서 예술이론을 정립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간단한 설명이 함축하는 것은 전혀 간단해 보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우리는 복제와 우연성의 의미에 대해서 맥락적으로 사고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플로레스의 연구 주제이기도 한 동남아시아의 국가 만들기 과정 속에서 현대미술의 성립은 한국과 같은 단일민족 체제 내에서 현대미술의 성립과정과 성격상 매우 다르다. 한국과 같은 단일 민족 사회의 국가 만들기 과정 속에서 현대미술의 의미는 자연스럽게 미술에 있어서 한국적인 것/민족적인 것의 정립과 현대성의 획득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으로 믿어진다. 그래서 상상의imaginary 가치로서 한국성의 가치가 탐구되며, 그것은 재현 가능한 어떤 것으로 그 구성원 스스로에게 최면을 건다. 그러나 이것이 피식민 주체들의 민족 이데올로기에 동반한 거대한 환상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반면 동남아시아에서는 자신들의 회복시킬 민족적인 것이라는 것이 불분명했다. 이러한 서술은 오히려 단일민족적 관점에서 평가되는 묘사인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민족적인 것, 전통적인 것이 불분명했다기 보다는 그들의 토대는 우리와 같은 단일 민족이 상상할 수 있는 범주를 벗어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더욱 정확할 것이다. 그들의 다원적이고 이종교배적인 문화적 토양은 자신들의 국가 만들기에서 외부의 유럽 중심적인 근대화의 개념을 본래적으로 성찰하도록 만들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문화적 배경에 대해서 인도네시아의 작가이자 큐레이터인 짐 수팡카트Jim Supangkat는 ‘멀티 모더니즘 multi-modernism’으로 규정한다. (민족) 국가의 영토와 경계 속에서 의미화되는 모더니티를 지우고, ‘수많-음many-ness’ 속에서 중첩되고 병존하는 문화적 상태로서의 근대적 속성을 찾아내는 것이다. 물론 수팡카트는 이것을 하나의 국가nation 속으로 한정 짓지만, 근대성에 대한 그의 태도는 전지구화라는 동시대 맥락에서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사실 레이문도 알바노는 플로레스의 표현 그대로, 마르코스 지배 체제 아래 즉 ‘적진의 한 가운데’에서 정부의 적극적인 후원 속에서 필리핀의 현대미술의 기초를 설립하고 부흥하고자 했던 인물이다. 그는 이멜다 마르코스가 설립한 필리핀 문화 센터의 관장으로서 자신의 작업 활동뿐만 아니라 해외 미술경향의 자국내 소개, 자국 작가들의 해외 진출 등에 중추적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서구의 개념미술을 개념적 태도로 전환시켜 자국의 현대미술의 동시대성을 탐구하고자 했던 그의 노력일 것이다. 물론 이 지점에서도 다소 논란의 여지는 있다. 민속적 가치를 부상시킴으로서 자국의 국가적 정체성을 표상하고자 했던 마르코스 정권의 정치이념에 상응하는 미묘한 민족주의적 색체를 그 역시 떨쳐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원적이고 혼종적인 필리핀의 문화적 조건과 서구에서 야기되는 동시대적 경향들을 개념적 태도로 변화시켜 필리핀의 상황 혹은 동남아시아의 상황에 대한 동시대성을 획득하고자 했던 그의 노력은 폄하될 수 없을 것이다.

‘모래에 발을 내딛고, 발자국을 만드세요 Step on the Sand and Make Footprints’는 여러가지로 중의적이다. 도전과 정복이라는 근대적 인간형의 의지로서 발자국은 비정형적인 모래 속에서 유희의 한 형식으로 변화된다. 엑조틱한 남국의 정취로서 모래 해변은 그들에게 생활의 조건이며 열대의 리얼리즘의 토대가 된다. 유럽중심적 표상원리로서 소조 예술은 임시적이고 찰나적인 우연성의 조형원리로 변화된다. 여기에 모래를 밟고 발자국을 만든다는 유아적인 유머가 깃든다. 시각 중심의 이성적 태도에서 벗어나 놀이와 웃음을 통한 촉각 중심의 감성적 태도가 모래를 밟는 각자의 발 밑에서 창조된다. 발자국을 남긴다는 행위가 거대한 역사적 행위로 의미화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들의 행위들로 즐겁게 전유된다. 그것은 전유가 아니라 어쩌면 본래 그래왔던 것의 자각일지도 모른다.  (김장언)

레이문도 알바노Raymundo Albano(1947–1985)는 필리핀의 현대미술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작가이다. 그는 작가의 역할에 머물지 않고 1972년부터 1885년까지 필리핀 문화센터 관장을 역임했으며, 마르코스 정권의 문화예술정책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작가로서 그는 초기 순수 추상미술에 경도되었지만, 점차로 실험적이고 개념적인 작업으로 전환했다. 이러한 변화는 설치 미술에 대한 탐구로 본격화되는데, 그는 설치미술을 통해 전통적인 것과 동시대적인 것이 결합을 이끌어 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그의 변화는 유럽중심적 순수 예술주의가 추구하는 폐쇄성, 가부장성, 전위성에 대한 반발이며, 다원적이고 혼성적인 태도를 개념적 형식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그의 노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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